실제 기록으로 만나는 역사
동학농민운동
수탈에 맞서 들고일어난 고을과, 신분의 굴레가 풀리던 세월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의 수탈에 맞선 봉기가 동학 조직과 만나 전라도 전체로 번진 농민운동입니다. 농민군은 5월 말 전주성에 들어갔다가 화약을 맺고 고을마다 집강소를 두었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가을에 다시 일어났으나 12월 공주 우금치에서 크게 졌습니다. 같은 해 갑오개혁으로 신분제와 노비 제도가 법으로 없어졌습니다.
한눈에 보기
- 기간
- 1894년 2월 고부 봉기 ~ 1895년 초 농민군이 흩어짐
- 이끈 사람
-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과 손화중·김개남 등 접주들
- 집강소
- 전라도 53주읍의 관아 안, 전주에 대도소
- 우금치
- 1894년 12월 4~7일(음력 11월 8~11일), 1만여 명이 500여 명으로
- 갑오개혁
- 1894년 7월 ~ 1896년 2월, 반상 혁파와 공사노비법 혁파
- 노비 제도
- 1886년 세습 폐지, 1894년 제도로 없어짐
왜 일어났을까
1876년 개항 뒤 외국 상인이 들어오고 쌀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가면서 쌀값이 올랐고, 지방관과 토호의 수탈은 더 심해졌습니다.
1860년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은 사람마다 한울님을 모신다는 가르침으로 서민층에 퍼졌습니다. 교조가 처형된 뒤 교도들은 1892년 공주와 삼례, 1893년 보은에 모여 교조의 억울함을 풀고 탄압을 멈추라고 요구했습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은 만석보 아래에 필요 없는 새 보를 쌓게 하고 물세로 700여 섬을 거두는 등 갖은 명목으로 수탈했습니다.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말목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이 관아로 쳐들어갔습니다.
실제 역사 연표
날짜는 모두 양력입니다. 1896년 1월 1일 전의 일은 대부분 음력으로 기록되어 있어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으로 양력으로 바꾸고, 필요하면 음력 날짜를 함께 적었습니다. 게임 속 날짜도 같은 양력을 씁니다.
1876~1893년 · 항구가 열리고 동학이 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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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봄·여름 · 고부에서 전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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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가을·겨울 · 다시 일어선 농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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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5년 · 상투와 의병,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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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0년 · 의병 전쟁과 나라를 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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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 노년에 들은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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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의 삶
왕과 장군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 낸 사람들의 하루를 따라가 봅니다.
- 18세기 후반부터 평민도 서당계를 꾸려 서당을 열었고, 훈장에게는 쌀과 땔나무, 옷가지를 주었습니다.
- 솔거노비는 주인의 논밭을 갈고 나무하기·물 긷기·심부름을 했고, 여자 노비는 밥 짓기와 베 짜기를 하다 밤에 제 몫의 길쌈을 했습니다. 1886년 노비 세습이 금지되고 1894년 노비 제도가 법으로 없어졌습니다.
- 모내기와 김매기처럼 일손이 한꺼번에 많이 드는 철에는 마을의 두레가 함께 일했고, 김매기를 마치면 호미씻이로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 혼례는 신부 집에서 올렸고, 18세기에 이르면 혼인 뒤 1~2년 안에 신부가 시집에 들어가는 것이 널리 퍼졌습니다.
- 괴질이라 부르던 콜레라가 1879·1881·1885·1886·1890년에 돌았습니다.
- 농민군은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외국 상인의 횡포와 쌀이 나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집강소 시기에는 노비들이 스스로 신분 해방을 실천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남긴 것
1899년 5월 동학의 남은 사람들이 '영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가 고창에서 관군에게 져 흩어졌습니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뒤에 항일 의병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1909년 남한 대토벌로 근거지를 잃은 의병은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 독립군으로 이어졌습니다.
동학은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었고, 천도교는 1919년 3·1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참고 자료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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