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BYEONGJA · 1627 · 1636~1637
새로운 인생 시작하기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본 역사
병자호란
두 번의 호란과 끌려간 사람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이들
1627년 후금(정묘호란)과 1636년 겨울 청(병자호란)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쳐들어온 전쟁입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서 버티다 1637년 1월 삼전도에서 항복했습니다. 청군은 돌아가며 많은 사람을 끌고 갔고, 몸값을 치르고 돌아온 사람은 그 가운데 일부였습니다.
한눈에 보기
- 기간
- 정묘호란 1627년 1~3월, 병자호란 1636년 12월~1637년 1월
- 조선의 임금
- 인조
- 맞선 나라
- 조선 ↔ 후금(1636년부터 청)
- 청군
- 12만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 2만)
- 끝
- 1637년 1월 30일 삼전도 항복
- 끌려간 사람
- 수만 명 (다른 기록에는 50만)
왜 일어났을까
1616년 세워진 후금은 명나라와 맞섰습니다. 광해군은 명의 요청으로 강홍립의 군대를 보내면서도 형세를 보아 움직이라고 일렀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들어선 조정은 명을 가까이하고 후금을 멀리했고, 후금은 이를 위협으로 여겼습니다.
1627년 1월 후금이 쳐들어왔습니다(정묘호란). 조선은 3월 3일 화의를 맺어 후금과 형제 관계가 되었고, 그 뒤 1628년부터 중강과 회령에서 두 나라 사이에 장이 섰습니다. 그러나 후금은 식량과 병선을 요구하고 압록강을 건너 변경의 민가를 약탈했습니다.
후금은 형제 관계를 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습니다. 1636년 2월 사신이 와서 이를 강요하자 조정은 사신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했고, 즉위식에 간 조선 사신 나덕헌은 하례를 거부했습니다. 11월 청이 보낸 마지막 요구를 조선이 묵살하자, 청은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실제 역사 연표
날짜는 모두 음력입니다. 게임 속 날짜도 같은 음력을 씁니다.
1608~1626년 · 두 호란 앞의 조선
1608년 2월
광해군이 임금 자리에 오름
광해군이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
1608년 5월 7일
경기에서 공물을 쌀로 거두기 시작함 (선혜법)
선혜청을 두고, 경기에서 공물을 쌀로 거두는 선혜법을 시작했습니다. 1결당 봄과 가을에 8말씩, 모두 16말이었습니다.
1618년 7월 19일
명을 돕는 북쪽 원정군을 뽑음
명을 돕는 원정군으로 군병 1만 명을 뽑으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강홍립이 이끈 1만 3천여 명이 출병했습니다.
1623년 3월 13일
한양에서 임금이 바뀜 (인조반정)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
1624년 2월 11일
이괄의 반란군이 한양에 들어왔다가 진압됨
1월 22일 영변에서 일어난 이괄의 군대가 2월 11일 서울에 들어왔고, 이튿날 길마재 싸움에서 졌습니다.
1626년 1월
호패법을 다시 시행함
호패법을 다시 시행했습니다. 정묘호란이 일어난 1627년 1월에 거두었습니다.
1627년 · 정묘호란
1627년 1월 13일
후금 군사가 쳐들어옴 (정묘호란)
후금의 3만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 13일 의주를 에워쌌습니다. 전쟁은 1월 중순부터 3월 초까지 두 달쯤 이어졌습니다.
1627년 1월
의주성이 무너짐
평안 감사 윤훤이 의주가 함락되었다고 조정에 알렸습니다.
1627년 1월
안주성이 무너짐
후금군은 의주와 능한산성을 거쳐 안주성에 이르렀습니다. 평안병사 남이흥은 무기가 다하자 성에 불을 지르고 죽었습니다.
1627년 1월 17일
삼남에서 군사를 뽑아 올려 보냄
조정은 전라도 3,000명, 충청도 5,000명, 경상도 2,000명의 군사를 뽑아 올리게 했습니다.
1627년 1월 19일
임금이 강화도로 피란함
인조가 강화도로 옮기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1627년 3월 3일
후금과 화의를 맺음
평산 남쪽으로는 내려오지 않은 후금군과 화의를 맺었습니다. 두 나라는 형제 관계가 되었고, 조선은 명에 맞서지 않기로 했습니다.
1636~1637년 · 병자호란
1636년 4월
후금이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꿈
후금이 나라 이름을 청, 연호를 숭덕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했습니다. 조선 사신 나덕헌은 하례를 거부했습니다.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옴 (병자호란)
청 태종이 이끈 12만 군사가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의주부윤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비켜 밤낮으로 내달려 13일 평양, 14일 개성을 지났습니다.
1636년 12월 14일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감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 했으나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16일 청군이 산성을 에워쌌습니다.
1637년 1월 21일 밤
강화도가 무너짐
청군이 강화도에 쳐들어왔습니다. 섬을 맡은 김경징 등은 배로 달아났고, 청군은 빈궁과 대군들을 끌고 나가며 관가와 민가를 불태우고 약탈과 살육을 벌였습니다.
1637년 1월 30일
임금이 삼전도에서 항복함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가 산성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항복했습니다.
1637년 2월 8일
청나라 군사가 돌아가며 세자와 대군을 데려감
청군이 돌아가며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 부부를 데려갔습니다. 척화를 주장한 오달제·윤집·홍익한도 심양으로 끌려갔습니다.
1637년 6월 10일
속환사가 심양에 가서 600여 명을 데려옴
신계영을 속환사로 보냈습니다. 일행은 16일 심양에 닿아 7월 7일 돌아왔는데, 수천 명 가운데 600여 명만 값을 치르고 데려왔습니다.
1637년 11월
최명길 일행이 780여 명을 데려옴
사은사 최명길 일행이 780여 명을 더 데려왔습니다.
1638~1645년 · 항복 뒤
1638년 3월 11일
조정이 돌아온 부녀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기로 함
끌려갔다 돌아온 며느리와 아들을 헤어지게 해 달라는 장유의 청을 두고 논의했습니다. 최명길이 반대했고 임금은 그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실록은 그 뒤 사대부 집안 자제들이 모두 다시 장가를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돌아옴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돌아와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1645년 4월 26일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남
소현세자가 23일 병석에 누운 지 나흘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 · 그 시대 사람들이 들은 소식
1649년 5월 13일
효종이 임금 자리에 오름
봉림대군이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효종).
1654년 6월
조총군이 흑룡강에서 러시아 군사를 물리치고 돌아옴
청의 요청으로 변급이 이끈 조총군 100명 등이 흑룡강에서 러시아군과 싸워 이기고, 5월 16일 군사를 돌려 6월에 돌아왔습니다.
1658년 6월
조총군이 다시 흑룡강에서 러시아 군사와 싸움
신류가 이끈 조총군 200명 등이 송화강과 흑룡강이 만나는 곳에서 러시아군과 싸웠습니다. 조선군은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다쳤습니다.
1659년 5월 9일
현종이 임금 자리에 오름
현종이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
1671년 2월 29일
팔도에 굶주림과 돌림병, 마마가 번짐 (경신대기근)
실록은 팔도에 굶주림과 돌림병, 마마로 죽은 백성을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고 삼남이 더욱 심했다고 적었습니다. 그해 가을 사헌부는 지난해(1670) 흉년이 예전에 없던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1674년 8월 23일
숙종이 임금 자리에 오름
숙종이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
1720년 6월 13일
경종이 임금 자리에 오름
경종이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
1724년 8월 30일
영조가 임금 자리에 오름
영조가 임금 자리에 올랐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
왕과 장군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 낸 사람들의 하루를 따라가 봅니다.
혼인과 집
이 무렵 혼례는 대개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치르고, 신부 집에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남귀여가). 인조 무렵 친영(신랑이 신부를 맞아 와 혼례를 올림)을 절충한 방식이 시도되었지만 자리 잡지 못했고, 시집에 1~2년 안에 들어가는 것이 널리 퍼진 것은 18세기에 와서입니다.
군역과 세금
열여섯에서 예순까지의 양인 남자는 군역을 졌고, 직접 번을 서는 대신 군포(베)를 내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중인 1594년부터는 양인과 천인을 섞어 고을마다 속오군을 짰는데, 고을의 교련장에서 훈련했습니다. 1636년 속오군은 8만 6천 명쯤이었습니다.
인조는 1626년 1월 호패법을 다시 시행했지만, 정묘호란이 일어난 1627년 1월 거두었습니다. 공물을 쌀로 내는 대동법은 1608년 경기에서 시작해 1623년 강원, 1651년 충청, 1658년 전라도 바닷가 고을, 1662년 전라도 산간 고을로 넓어졌습니다. 평안도에서는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정묘호란과 북쪽 고을
1627년 1월 후금군은 의주를 무너뜨리고 용천과 선천을 거쳐 안주성을 함락했고, 평양을 지나 황주까지 내려왔습니다. 평안도 사람들은 침략의 길목에서 전쟁을 고스란히 겪었습니다. 임금은 강화도로 옮겼고, 세자는 전주로 내려갔습니다. 조정은 전라·충청·경상도에서도 군사를 뽑아 올리게 했습니다.
정묘호란 뒤에는 의주와 중강의 장터에서 끌려간 사람을 몸값을 치르고 되찾아 오는 일이 있었습니다. 몸값은 처음 청포 10필이었다가 65필까지 올랐고, 때로는 100필에 이르렀습니다.
남한산성과 강화도
1636년 12월 임금이 남한산성에 갇히자 도마다 군사가 구하러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충청도 군사는 험천에서, 경상도 군사는 광주 쌍령에서 무너졌습니다. 전라 병사 김준룡은 곳곳에서 군사를 모아 용인 광교산에 진을 치고 청의 장수를 쓰러뜨렸지만, 손실이 커서 수원으로 물러났습니다.
왕실 가족과 대신들의 식구가 피해 있던 강화도는 1637년 1월 21일 밤 무너졌습니다. 청군은 관가와 민가를 불태우고 약탈과 살육을 벌였고, 김상용처럼 목숨을 끊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 소식에 인조는 산성을 나와 항복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과 몸값
청군은 돌아가며 수많은 사람을 끌고 갔습니다. 백과사전은 그 수를 '수만(다른 기록에는 50만)'이라고 적습니다. 청군은 붙잡은 사람들을 싸움에 나선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1637년 2월부터 심양 교외에 속환시가 열려, 주인과 가족이 몸값을 흥정했습니다. 평민의 몸값은 처음 은 10냥에서 40~50냥으로 올랐고, 양반은 150~400냥, 때로는 1,500냥에 이르렀습니다. 부유한 집이 큰돈을 내면서 값이 올라 가난한 사람들은 식구를 되찾기 어려웠습니다. 조정은 몸값 상한을 100냥으로 정했지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해 6월 속환사 신계영은 수천 명 가운데 600여 명을, 11월 최명길 일행은 780여 명을 데려왔습니다. 세 차례의 큰 속환을 다 합쳐도 돌아온 사람은 2,000명이 되지 못했고, 많은 사람이 만주에 남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달아나 돌아온 사람의 몸값을 나라가 대신 물어 준 일도 있었지만, 항복 조건에는 압록강을 건넌 뒤 달아난 사람을 돌려보낸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끌려갔다 돌아온 것만으로 차별과 멸시를 받는 일은 임진왜란 때부터 있었습니다. 1638년 3월에는 끌려갔다 돌아온 며느리와 아들을 헤어지게 해 달라는 장유의 청과, 돌아온 딸을 두고 사위가 새 장가를 들려 한다는 한이겸의 호소가 함께 조정에 올라왔습니다.
최명길은 헤어지는 것을 허락하면 속환을 바라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라며 반대했고, 인조는 그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실록은 그 뒤 사대부 집안 자제들이 모두 다시 장가를 들었고 다시 합한 사람이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같은 기사에서 사관은 최명길을 거칠게 비난했습니다.
흉년과 돌림병
전쟁이 끝나고 한 세대가 지난 1670년, 예전에 없던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듬해 봄 실록은 팔도에 굶주림과 돌림병, 마마로 죽은 백성을 다 적을 수 없었고 삼남이 더 심했다고 적었습니다. 수령들은 관에서 죽을 쑤어 먹이는 곳에서 죽은 사람만 보고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남긴 것
항복 조건에 따라 조선은 청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명과 관계를 끊었으며, 왕자와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보내고, 청이 명을 칠 때 원군을 보내고, 1639년부터 해마다 세폐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해 삼전도에는 청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비가 세워졌습니다.
청은 여러 차례 조선군을 명 정벌에 보내게 했지만, 1641년 금주 싸움에 간 조선군 장수 유림은 싸움을 피하고 명군을 향해 공포만 쏘았다고 합니다. 소현세자는 1645년 돌아왔지만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고, 볼모였던 봉림대군은 효종이 되어 북벌을 계획했으나 이루지 못했습니다.
1646년 청의 요구로 의주 북쪽 중강의 장이 다시 열렸습니다. 조선은 소·소금·종이·미역·해삼·면포·사기를 내보냈고, 청 상인은 소와 소금을 가장 원했습니다. 1654년과 1658년에는 청의 요청으로 조총군이 흑룡강까지 가서 러시아군과 싸웠습니다.
게임 속 이야기와 실제 역사
3만일록은 실제 역사 위에 지어낸 한 사람의 인생을 얹은 게임입니다. 무엇을 지어냈고 무엇이 실제인지 나란히 적습니다.
- 사람
- 게임에서는주인공과 가족, 이웃은 모두 지어낸 사람입니다. 실제 역사 인물은 소문이나 소식으로만 나옵니다.
- 실제로는남이흥, 김준룡, 최명길, 신계영처럼 이 페이지에 나오는 사람은 실제 기록에 있는 인물입니다.
- 고을
- 게임에서는의주·안주·광주·강화·전주 다섯 고을에서만 태어납니다. 끌려가면 심양으로 갑니다.
- 실제로는후금과 청의 군사는 압록강에서 한양 근처까지 내려왔고, 끌려간 사람들의 몸값은 심양 교외의 속환시에서 흥정했습니다.
- 끌려간 사람
- 게임에서는끌려가면 몸값을 치르고 돌아오거나, 달아나거나, 그곳에 남는 길로 갈립니다. 갈리는 확률은 보이지 않습니다.
- 실제로는실제로 돌아온 사람은 끌려간 사람 가운데 일부였고, 많은 사람이 만주에 남았습니다.
- 돌아온 여성
- 게임에서는끌려갔다 돌아온 아내나 누이를 다시 맞아들일지는 집안의 결정으로 나옵니다. 장면은 그리지 않습니다.
- 실제로는1638년 조정은 헤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실록은 사대부 집안 자제들이 대개 다시 장가를 들었다고 적었습니다. 이 논의는 양반 집안의 일로 기록되었습니다.
- 날짜
- 게임에서는음력 한 달 단위로 흐릅니다. 쌍령과 광교산 싸움은 날짜를 확인하지 못해 '산성이 에워싸인 동안'으로만 나옵니다.
- 실제로는위 연표에는 자료로 확인한 날을 일(日)까지 적었습니다.
- 사건
- 게임에서는'역사' 표시가 붙은 기록만 실제 연표에서 왔습니다. 피란 길, 혼담, 흉년의 나눔 같은 나머지 일은 그 시대에 있을 법한 일을 지어낸 것입니다.
- 실제로는이 페이지에는 자료로 확인한 사실만 적었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은 싣지 않았습니다.
참고 자료와 출처
이 페이지의 사실은 모두 아래 자료에서 확인했습니다. 날짜는 음력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 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 7일, 선혜청을 설치하다
- 광해군일기 10년 7월 19일, 군병 1만 명을 징발하여 누루하치를 정벌하는 일로 전교하다
- 인조실록 5년 1월 19일
- 인조실록 5년 1월 17일, 금나라가 침입하자 대책을 논의하다
- 인조실록 5년 1월 17일, 평안 감사 윤훤이 의주가 금나라에게 함락되었다고 아뢰다
- 인조실록 15년 2월 8일, 구왕이 철군하면서 왕세자와 빈궁, 봉림 대군과 부인을 데려가자 전송하다
- 인조실록 16년 3월 11일, 신풍 부원군 장유가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온 부녀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 계하다
- 효종실록 즉위년 5월 13일
- 현종실록 즉위년 5월 9일
- 현종실록 12년 2월 29일, 팔도에 기아와 여역과 마마가 심하다
- 현종실록 12년 9월 9일, 적곡에 대해 의논하다
- 숙종실록 즉위년 8월 23일, 왕세자의 즉위 교서
- 경종실록 즉위년 6월 13일
- 영조실록 즉위년 8월 30일, 대왕이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