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COLONIAL · 1910~1945
새로운 인생 시작하기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본 역사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땅에서, 압록강과 바다 건너에서 살아 낸 사람들
1910년 8월 나라를 빼앗긴 뒤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조선총독부가 이 땅을 다스린 시기입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번졌고, 땅을 잃거나 살길을 찾아 만주와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많았습니다. 1930년대 말부터는 전쟁 동원과 창씨가 이어졌습니다.
한눈에 보기
- 기간
- 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
- 다스린 곳
- 조선총독부
- 3·1운동
- 1919년 3월 1일 시작, 4월까지 전국 13도로
- 만주로 간 사람
- 1945년까지 약 200만 명
- 창씨 신고
- 1940년 2~8월, 최종 81.5%
- 광복 뒤 만주에서 돌아온 사람
- 약 70만 명 (중국에 살던 한인의 40%)
왜 일어났을까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나랏빚을 백성의 손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사람들은 담배를 끊어 돈을 모으고 부녀자들은 패물을 냈습니다. 그해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병합조약이 조인되고 29일 공포되어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같은 날 조선총독부를 두는 칙령이 나왔습니다.
실제 역사 연표
날짜는 모두 양력입니다. 게임 속 날짜도 같은 양력을 씁니다.
1905~1910년 · 나라를 잃기까지
1905년 11월 17일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이 맺어짐 (을사늑약)
을사조약이 맺어져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1907년 2월
나랏빚을 우리 손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남
2월 중순 대구 광문사에서 나랏빚을 갚자는 운동을 제창했습니다. 담배를 끊어 모은 돈을 냈고, 부녀자들은 패물을 냈습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의병이 다시 일어남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습니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빼앗김 (경술국치)
22일 조인된 병합조약이 29일 공포되어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같은 날 조선총독부를 두는 칙령이 나왔습니다.
1911~1918년 · 헌병과 토지 조사
1912년 3월
조선 사람에게만 매질하는 벌(태형)을 정한 법이 나옴
조선태형령으로 조선 사람에게 벌금이나 구류 대신 매를 치는 벌을 내릴 수 있게 했습니다. 헌병경찰이 집행했고, 1920년에 없어졌습니다.
1912년 8월
땅 주인이 스스로 신고하게 하는 토지조사령이 나옴
토지조사령이 공포되었습니다. 땅 주인이 정해진 기간에 스스로 신고하는 방식이었고, 사업은 1918년 11월에 끝났습니다.
1918년 11월
독감이 전국에 크게 돎
유행성 독감이 크게 돌았습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로는 조선 사람 742만여 명이 걸렸고, 매일신보는 11월부터 거의 날마다 독감 소식을 실었습니다.
1919년 · 3·1운동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남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마을마다 흰 갓을 쓰고 망곡(멀리서 곡함)을 했습니다. 국장은 3월 3일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외치는 만세 소리가 전국에 퍼짐 (3·1운동)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3월 중순부터 4월까지 전국 13도로 번졌습니다.
1919년 3월 17일
안동 장날마다 만세 시위가 일어남
예안장터에서 시작해 18일과 23일 안동읍(3,000여 명), 21일 임동 편항장과 임하·길안에서 만세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23일 일본군의 발포로 1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19년 3월
군산에서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 시위에 앞장섬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호남에서 처음으로 만세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군산에서는 5월까지 28회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1919년 3월
동래장터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남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동래장터 만세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경상남도에서는 3월 11일 부산진 시위가 처음이었습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짐
상하이에서 임시헌장을 반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1919년 8월
헌병이 맡던 경찰 일을 보통 경찰이 맡게 됨
조선총독부 관제를 고쳐 헌병경찰제를 없애고 보통경찰제로 바꾸었습니다.
1920~1937년 · 고향과 간도, 그리고 바다 건너
1920년 4월 1일
우리말 신문(조선일보·동아일보)이 나오기 시작함
3월 5일 조선일보,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습니다.
1920년 6월
북간도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이김
북간도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1920년 10월 21~26일
북간도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이김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이겼습니다. 그 뒤 일본군의 대토벌을 피해 독립군은 노령(러시아 땅)으로 옮겨 갔습니다.
1920년 10월 9일
일본군이 간도의 조선 사람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임 (경신참변)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일본군이 간도의 조선 사람 마을을 습격해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희생자 수는 백과사전의 경신참변 항목이 3,469명(27일간 집계), 일제강점기 항목이 1만여 명으로 적습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 지방에 큰 지진이 나고, 그 뒤 많은 조선 사람이 죽임을 당함
관동 지방에 큰 지진이 난 뒤 '조선 사람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헛소문이 퍼져 많은 조선 사람이 학살되었습니다. 희생자 수는 알 수 없습니다.
1925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려면 경찰서의 도항증명을 받아야 하게 됨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람을 막는 도항 제한이 시작되어, 꼭 가야 하는 사람만 관할 경찰서에서 도항증명서를 받아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 날 학생들이 만세를 부름 (6·10만세운동)
4월 26일 세상을 떠난 순종의 인산(장례) 날, 종로 일대에서 학생들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전국에서 1,000여 명이 붙잡혔습니다.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함
정동의 경성방송국이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만세가 전국으로 번짐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 충돌이 시위로 번져, 이듬해 1월까지 전국 194개 학교 5만 4천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함 (만주사변)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습니다.
1932년 3월
일본이 만주에 만주국을 세움
만주국이 세워졌고, 그 뒤 조선총독부는 조선 사람을 만주로 보내는 정책이민을 밀어붙였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요인들을 향해 폭탄이 던져짐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요인들을 향해 폭탄을 던졌습니다.
1936년 8월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함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습니다. 8월 25일 동아일보는 손기정 사진의 일장기를 지워 실은 일로 9개월 동안 정간되었습니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시작함 (중일전쟁)
노구교 충돌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조선 사람을 동원하는 일이 늘었습니다.
1938~1945년 · 전쟁 동원과 해방
1938년 2월
조선 청년을 일본 군대에 받는 지원병 제도가 생김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으로 만 17세 이상, 소학교를 마친 조선 청년을 일본 군대의 지원병으로 받기 시작했습니다.
1938년 4월
보통학교가 소학교로 바뀜
3월 4일 공포된 제3차 조선교육령으로 보통학교의 이름이 소학교로 바뀌었습니다.
1938년 5월 5일
국가총동원법이 조선에도 시행됨
4월 1일 일본이 공포한 국가총동원법을 5월 5일부터 조선에서도 시행했습니다.
1940년 2월 11일
일본식 성을 새로 정해 신고하게 함 (창씨)
조선민사령을 고쳐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조선 사람에게 일본식 씨명을 정해 신고하게 했습니다.
1941년 4월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바뀜
3월 31일 국민학교령으로 소학교의 이름이 국민학교로 바뀌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함 (태평양전쟁)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태평양전쟁). 같은 해 어른 한 사람의 하루 식량 배급은 2합 7작이었습니다.
1942년 3월
관청이 나서서 일꾼을 모아 보내기 시작함 (관알선)
일꾼을 모아 보내는 방식이 '모집'에서 관청이 직접 나서는 '관알선'으로 바뀌었습니다. 1944년 10월부터는 영장으로 끌어가는 징용이 되었습니다.
1944년 4월 1일
조선 청년의 첫 징병검사
4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 조선 청년의 첫 징병검사가 치러져 20만 6,057명이 검사를 받았습니다. 합격자는 그해 9월부터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차례로 끌려갔습니다.
1944년 10월
징용 영장이 나오기 시작함
국민징용령을 조선에도 적용해 영장으로 일꾼을 끌어갔습니다. 영장에 따르지 않으면 처벌을 받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해방됨
일본이 항복하고 나라가 해방되었습니다.
1945년 9월 7~9일
38선 남쪽에 미군이 들어와 군정을 폄
7일 맥아더 포고 제1호로 38선 남쪽에 미군정이 선포되었고,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 9일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광복 뒤 · 그 세대가 들은 소식
1946년 10월 23일
본래 성과 이름을 되찾게 함
군정청 법령 제122호 조선성명복구령으로 일본식 씨명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 되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쳐내려옴
새벽, 북한군이 서쪽 옹진반도에서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짐
정전협정이 맺어져 3년 1개월 만에 싸움이 멈추었습니다.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서고 대통령이 물러남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섰고,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군인들이 정권을 잡음
군인들이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았습니다.
1970년 4월
새마을가꾸기 운동이 시작됨
새마을가꾸기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970년 10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마을마다 시멘트를 나눠 주어 마을 안길과 지붕을 고치게 했습니다.
1983년 6월 30일
이산가족을 찾는 생방송이 시작됨
6월 30일 밤 시작된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이 11월 14일까지 138일, 453시간 45분 동안 이어졌고, 1만 189명이 가족을 만났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
왕과 장군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 낸 사람들의 하루를 따라가 봅니다.
헌병과 태형 (1910년대)
1910년 9월부터 1919년 8월까지는 헌병이 경찰 일을 맡았습니다. 1912년 3월 조선태형령은 조선 사람에게 벌금이나 구류 대신 매를 치게 했고, 헌병경찰이 이를 집행했습니다. 태형은 1920년에 없어졌습니다.
1918년 11월에는 유행성 독감이 크게 돌았습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로는 조선 사람 742만여 명이 걸렸습니다.
땅과 소작
1912년 8월 토지조사령으로 땅 주인이 스스로 신고하는 방식의 토지 조사가 진행되어 1918년 11월에 끝났습니다. 신고한 지주는 소유권을 얻었고, 많은 농민이 소작농이 되었습니다.
소작료는 일반 소작지에서 수확의 5할에서 6할로 올랐고, 다른 부담까지 더하면 7~8할에 이르렀습니다. 수리조합비와 비료값도 소작인에게 떠넘겨졌습니다. 소작 기간이 1년이어서 1923년부터는 소작권을 빼앗겠다는 위협이 잦았고, 1925년에는 소작인의 40%가 바뀌었습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서 마름이 몫을 챙기기도 했습니다.
옥구의 이엽사 서수농장은 소작료로 수확의 75%를 거두었고, 1927년 옥구농민조합이 오랫동안 소작쟁의를 벌였습니다.
쌀이 나가는 항구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이 이어지면서 많은 쌀이 일본으로 나가 조선 안에서는 쌀이 모자랐습니다. 수리조합비를 감당하지 못해 땅을 팔고 소작농이나 떠돌이가 되거나 만주로 옮겨 간 사람도 많았습니다.
군산항은 호남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 나가는 항구였습니다.
3·1운동
1919년 1월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마을마다 흰 갓을 쓰고 망곡을 했습니다. 국장은 3월 3일로 잡혔습니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에서는 대한문 앞에서 절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도시의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았습니다(철시). 만세는 3월 중순부터 4월까지 전국 13도로 번졌습니다.
안동에서는 3월 17일 예안장터를 시작으로 18일과 23일 안동읍(3,000여 명), 21일 임동 편항장과 임하·길안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23일 일본군의 발포로 1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산에서는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호남에서 처음으로 만세를 불렀고 5월까지 28회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동래장터의 만세는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이끌었습니다.
일제는 총을 쏘고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매를 쳤습니다. 그해 10월까지 1만 8천여 명이 구속되었습니다. 4월 11일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8월에는 헌병경찰제가 없어지고 보통경찰제로 바뀌었습니다.
서간도와 독립군
1911년 안동의 유림 이상룡이 서간도로 망명했고, 그해 삼원보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가 세워졌습니다. 신흥강습소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바뀌었다가 1920년 가을 문을 닫았습니다.
서간도의 한인들은 자치 단체 한족회를 꾸렸고, 1919년 서로군정서가 세워졌습니다. 재정은 한족회 회원들의 의무 헌금으로 꾸렸고, 경상도에서 군자금을 모으다 발각된 후원 조직도 있었습니다.
1920년 6월 봉오동,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크게 이겼습니다. 그 뒤 일본군의 대토벌을 피해 독립군은 노령으로 옮겨 갔습니다. 1924년에는 집안현에 참의부가 세워졌습니다.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일본군은 간도의 조선 사람 마을을 습격해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경신참변). 희생자 수는 백과사전의 경신참변 항목이 3,469명(27일간 집계), 일제강점기 항목이 1만여 명으로 적습니다.
간도에 뿌리내린 사람들
조선 사람은 1870년대부터 만주로 옮겨 가 습지를 논으로 일구어 벼농사를 지었습니다. 1945년까지 만주로 간 사람은 약 200만 명이었습니다.
1931년 9월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3월 만주국이 세워지자, 조선총독부는 조선 사람을 만주로 보내는 정책이민을 밀어붙였습니다. 1933년 뒤로는 만주국의 집단부락과 조선총독부의 안전농촌이 만들어졌습니다.
바다 건너 오사카
일본으로 건너가는 관부연락선은 1905년 9월에 생겼습니다. 오사카의 조선 사람은 1921년 7,421명이었고, 1922년에는 오사카조선노동동맹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카이노의 한인촌 사람들은 고무 공장 하청, 토목, 노점 일을 했습니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뒤 '조선 사람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헛소문이 퍼져 많은 조선 사람이 학살되었습니다. 희생자 수는 알 수 없습니다. 일본 정부는 233명이라고 발표했고, 『독립신문』은 6,661명이라고 적었습니다.
1925년 10월부터는 꼭 가야 하는 사람만 관할 경찰서의 도항증명서를 받아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학교와 신문, 라디오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은 1911년 4년이었다가 1922년 6년(지역에 따라 4·5년)이 되었습니다. 보통학교는 1938년 소학교, 1941년 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920년 3월 5일 조선일보,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되었고, 1927년 2월 16일 정동의 경성방송국이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1936년 8월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동아일보는 사진의 일장기를 지워 실었다가 9개월 동안 정간되었습니다.
전쟁 동원과 창씨 (1937~1945)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조선 사람의 동원이 늘었습니다. 1938년 2월 지원병 제도가 생겼고, 5월부터 국가총동원법이 조선에도 시행되었습니다.
1940년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일본식 씨명을 신고하게 했습니다. 5월 중순까지 신고한 집은 7.6%였지만 최종 81.5%가 되었습니다. 신고하지 않은 집의 아이는 입학과 진급에서 차별을 받았고, 관청은 민원을 받아 주지 않고 배급을 주지 않았으며, 노무 동원과 징용에 먼저 지명했습니다.
1940년부터 쌀을 강제로 거두는 공출이 시작되었고, 쇠붙이를 모은다며 집집의 놋그릇과 숟가락까지 거두어 갔습니다. 어른 한 사람의 하루 식량 배급은 1941년 2합 7작에서 1945년 2합으로 줄었고, 사람들은 만주좁쌀이나 콩깻묵 같은 대용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일꾼을 데려가는 방식은 모집에서 1942년 3월 관알선을 거쳐 1944년 10월부터 영장으로 끌어가는 징용이 되었습니다. 1944년 4월부터는 조선 청년도 징병검사를 받았습니다.
전쟁이 남긴 것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나라가 해방되었습니다. 9월 7일 맥아더 포고 제1호로 38선 남쪽에 미군정이 선포되었고, 1946년 10월 조선성명복구령으로 일본식 씨명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 되었습니다.
광복 뒤 만주에서 돌아온 사람은 중국에 살던 한인의 40%, 약 70만 명으로 추정되고, 많은 사람이 그대로 만주에 남았습니다. 일본에서는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항구마다 몰렸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게임 속 이야기와 실제 역사
3만일록은 실제 역사 위에 지어낸 한 사람의 인생을 얹은 게임입니다. 무엇을 지어냈고 무엇이 실제인지 나란히 적습니다.
- 사람
- 게임에서는주인공과 가족, 동무 봉수와 옥이, 서당의 윤 선생은 모두 지어낸 사람입니다. 실제 역사 인물은 소문이나 소식으로만 나옵니다.
- 실제로는이상룡, 윤봉길, 손기정처럼 이 페이지에 나오는 사람은 실제 기록에 있는 인물입니다.
- 고을
- 게임에서는안동·종로·군산·동래 네 고을에서만 태어납니다. 살다가 압록강 건너 간도나 바다 건너 오사카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 실제로는1945년까지 만주로 간 조선 사람은 약 200만 명이었고, 오사카의 조선 사람은 1921년 7,421명이었습니다.
- 독립군
- 게임에서는부대에 들면 이름 없는 부대에서 국경 습격, 군자금 임무, 경신참변 때의 피신 같은 큰 결정을 몇 번 겪고, 고향으로 돌아오거나 간도에 남거나 끝까지 싸움터에 남습니다. 갈리는 확률은 보이지 않습니다.
- 실제로는서간도에는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가 있었고, 재정은 한족회 회원들의 의무 헌금으로 꾸렸습니다. 경상도에서 군자금을 모으던 후원 조직도 있었습니다.
- 협력
- 게임에서는일제에 앞장서 협력하는 길은 두지 않았습니다. 창씨 신고나 자식의 동원처럼 식구를 지키려는 선택만 나옵니다.
- 실제로는창씨를 하지 않은 집은 아이의 입학, 배급, 징용에서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 날짜
- 게임에서는양력 한 달 단위로 흐릅니다. 군산과 동래의 만세는 날짜가 자료마다 달라 '3월'로만 나옵니다.
- 실제로는위 연표에는 자료로 확인한 날을 일(日)까지 적었습니다.
- 사건
- 게임에서는'역사' 표시가 붙은 기록만 실제 연표에서 왔습니다. 혼담, 보릿고개, 숨겨 달라는 낯선 사람 같은 나머지 일은 그 시대에 있을 법한 일을 지어낸 것입니다.
- 실제로는이 페이지에는 자료로 확인한 사실만 적었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은 싣지 않았습니다.
참고 자료와 출처
이 페이지의 사실은 모두 아래 자료에서 확인했습니다. 날짜는 음력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을사조약
- 헤이그 특사 사건
- 국채보상운동
- 정미의병
- 한일합병
- 한일병합조약
- 대한제국
- 태형
- 헌병사령부
- 토지조사사업
- 보통학교
- 조선교육령
- 3·1운동
- 서울 탑골공원
- 안동 3·1운동
- 군산제일고등학교
- 군산시
- 허영호
- 대한민국 임시정부
- 산미증식계획
- 군산항
- 소작쟁의
- 이엽사
- 동아일보
- 조선일보
- 6·10만세운동
- 경성방송국
- 광주학생운동
- 훙커우공원 의거
- 손기정
- 일장기 말소사건
- 신흥무관학교
- 경학사
- 한족회
- 서로군정서
- 참의부
- 이상룡
- 봉오동전투
- 청산리대첩
- 경신참변
- 만주
- 집단부락
- 안전농촌
- 재외동포
- 부관연락선
- 오사카조선노동동맹회
- 오사카 이쿠노구 한인촌
- 재일조선인 귀환
- 강명규
- 조선인 강제동원
- 징병거부운동
- 식량배급제도
- 일제강점기
- 공출
- 조선인 강제연행
- 징용거부운동
- 창씨개명 거부운동
- 국가총동원법
- 초등학교
- 한국전쟁
- 미군정청
- 4·19혁명
- 5·16
- 새마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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