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IMJIN · 1592~1598
새로운 인생 시작하기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본 역사
임진왜란
바다 건너 닥친 7년 전쟁, 그 속을 산 평범한 사람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두 차례 조선에 쳐들어온 전쟁입니다.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명나라 군대가 들어왔습니다. 7년 동안 백성들은 굶주림과 돌림병을 겪었고, 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한눈에 보기
- 기간
- 1592~1598년, 두 차례
- 조선의 임금
- 선조
- 맞선 나라
- 조선·명 ↔ 일본
- 일본군
- 20만여 명
- 끝
- 1598년 11월 노량 바다 싸움
- 경작지
- 170만 결 → 54만 결
왜 일어났을까
16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랜 내전(전국 시대)을 수습하고 나라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나라 안을 통일한 뒤 대륙을 침략하려는 생각에 빠졌고, 조선과 동맹을 맺어 명나라를 치려는 뜻으로 조선과 교섭했다고 적습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의 사정과 도요토미의 속뜻을 살피려고 1590년 3월 통신사를 보냈고, 일행은 이듬해 3월에 돌아왔습니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병선을 많이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전쟁이 날 것이라고 했고, 부사 김성일은 쳐들어올 낌새를 보지 못했다고 보고했습니다.
1592년 4월 일본은 군대를 아홉 갈래로 나누어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정규 육군만 15만 8,700명, 전체 병력은 20만여 명이었습니다.
실제 역사 연표
날짜는 모두 음력입니다. 게임 속 날짜도 같은 음력을 씁니다.
1592년 · 전쟁이 닥치다
1592년 4월 13~15일
왜군이 부산에 올라옴
13일 왜군이 부산에 쳐들어왔습니다. 14일 부산진성이, 15일 동래성이 무너졌습니다.
1592년 4월 19~20일
김해성이 무너짐
구로다가 이끈 왜군이 죽도에 올라 김해성을 무너뜨렸습니다.
1592년 4월 18~19일
왜군이 밀양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감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밀양성을 무너뜨리고 청도와 대구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1592년 4월 22일
의령에서 의병이 일어남
의령의 유생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해 5월 하순 정암진에서 왜군을 이겼습니다.
1592년 5월 2~3일
임금이 한양을 떠나고 왜군이 한양에 들어옴
임금은 4월 30일 새벽 한양을 떠났고, 왜군은 5월 2~3일 한양에 들어왔습니다.
1592년 6월 1일
전라도에서 의병이 일어남
전라도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모아 6월 1일 길을 떠났고, 김천일도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1592년 7월 8일
한산 앞바다 싸움에서 이김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 수군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1592년 7월 9~10일
금산 싸움에서 의병이 크게 짐
고경명이 이끈 전라도 의병이 금산의 왜군을 치다가 크게 졌고, 고경명이 전사했습니다.
1592년 10월
진주성에서 왜군을 물리침
김시민이 이끈 진주성 싸움에서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1593~1596년 · 싸움과 교섭
1593년 1월 8일
평양성을 되찾음
1592년 12월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왔고, 이듬해 1월 8일 평양성을 되찾았습니다.
1593년 2월 12일
행주산성 싸움에서 이김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백과는 아낙들까지 돌을 날라 싸움을 도왔다고 적습니다.
1593년 4월 18일
왜군이 한양에서 물러남
강화 교섭에 따라 왜군이 한양에서 물러났습니다.
1593년 5월
왜군이 김해 죽도에 성을 쌓음
왜군이 김해 죽도에 성을 쌓았습니다. 쌓기 시작한 때는 자료에 따라 5월 또는 7월 무렵으로 적습니다. 강화 교섭 동안에도 물러나지 않은 여섯 왜성 가운데 하나로, 1598년 10월 무렵까지 쓰였습니다.
1593년 6월 21~29일
진주성이 무너짐
왜군이 다시 진주성을 쳐 6월 29일 무너뜨렸습니다. 성안의 사람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593년 8월
훈련도감을 세움
훈련도감을 임시 기구로 세웠습니다. 조총을 쏘는 포수가 주축이었고, 군사는 한 달에 쌀 여섯 말을 급료로 받으며 교대 없이 복무했습니다.
1594년 1월
큰 기근과 돌림병
기근과 돌림병이 겹쳤습니다. 1593년 12월 한양의 진제장(굶주린 사람을 먹여 살리던 곳)에서도 굶어 죽는 사람이 이어졌고, 조정은 충청도와 경상도에 진휼 어사를 보냈습니다.
1594년 1월
강화 교섭이 이어짐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 교섭이 1592년 8월부터 1596년 9월 결렬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동안에도 일부 왜군은 남해안의 성에 남아 있었습니다.
1597~1598년 · 다시 온 전쟁
1597년 1월
왜군이 다시 쳐들어옴 (정유재란)
교섭이 깨진 뒤 왜군이 다시 바다를 건너왔습니다(정유재란). 앞선 부대는 1월 중순에 들어왔고, 본격적인 침공은 7월 이후입니다.
1597년 7월 15~16일
칠천량에서 수군이 크게 짐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크게 졌습니다.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이 무너짐
며칠 동안 싸운 끝에 남원성이 무너졌습니다. 성을 지키던 군사와 백성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사와 주민의 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습니다.
1597년 9월 7일
직산에서 북쪽으로 오던 왜군을 막음
직산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던 왜군을 막았습니다.
1597년 9월 16일
명량에서 왜 수군을 물리침
조선 수군이 명량에서 왜 수군을 물리쳤습니다.
1598년 11월 18~19일
노량 바다 싸움, 전쟁이 끝남
노량 바다 싸움을 끝으로 7년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쟁 뒤 · 그 시대 사람들이 들은 소식
1605년 4월
사명당 일행이 포로들과 돌아옴
승려 유정(사명당)이 1604년 탐적사로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오는 일, 나라 사이의 교류를 다시 여는 일을 논의했고, 이듬해 4월 돌아왔습니다.
1607년 7월 19일
사신을 따라 포로들이 돌아옴
일본에 갔던 사신 일행(회답겸쇄환사)이 끌려간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1608년 2월
새 임금(광해군) 즉위
광해군이 임금이 되었습니다.
1608년 5월 7일
경기에서 공물을 쌀로 거두기 시작함
경기에서 공물을 쌀로 거두는 대동법을 시작했습니다. 땅 1결마다 봄과 가을에 8말씩, 한 해 16말을 냈습니다.
1618년 7월
명을 돕는 북쪽 원정군을 뽑음
명나라를 도우려 북쪽으로 보낼 군사를 뽑았습니다.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았고, 1만 3천여 명이 나갔습니다.
1623년 3월 13일
한양에서 임금이 바뀜 (인조반정)
인조반정으로 임금이 바뀌었습니다.
1624년 2월 11일
이괄의 반란군이 한양에 들어왔다가 진압됨
이괄의 반란군이 2월 11일 한양에 들어왔다가 이튿날 싸움에서 지고 달아났습니다.
1627년 1월
후금 군사가 쳐들어옴 (정묘호란)
후금 군사가 쳐들어왔고(정묘호란), 임금은 강화도로 피했습니다. 3월 3일 화의를 맺었습니다.
1636년 12월
청 군사가 쳐들어옴 (병자호란)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왔고(병자호란), 이듬해 1월 30일 삼전도에서 항복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
왕과 장군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 낸 사람들의 하루를 따라가 봅니다.
군역과 장시
양인 남자는 16세부터 60세까지 군역을 졌습니다. 서울에 올라가 번을 서는 정병은 여덟 무리로 나뉘어 돌아가며 한 번에 두 달씩 복무했습니다.
16세기에는 직접 번을 서는 대신 베를 내는 일이 널리 퍼졌고, 1541년에는 군역 대가를 베 3~4필로 정해 제도로 만들었습니다. 이 베(군포)는 관리들이 백성을 쥐어짜는 수단이 되기도 해서, 감당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장시는 15세기 후반 전라도에서 처음 보고된 뒤 조금씩 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 열렸습니다.
혼인과 가족
혼인하면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고 그 집에서 혼인 생활을 시작하는 남귀여가가 오래 이어졌습니다. 신부를 신랑 집으로 맞아 오는 친영을 들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성리학자들도 대체로 옛 풍속을 따랐습니다. 혼례 뒤 처가에 머무는 기간은 점차 줄어드는 흐름이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여성의 재혼을 막은 법(1477)은 양반 집안 여성의 자손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양반이 아닌 여성까지 수절하는 일이 많아진 것은 조선 후기의 일입니다.
『경국대전』은 평민에게 부모 제사만 받들게 했습니다. 16세기까지는 아들과 딸이 돌아가며 제사를 맡는 일(윤회봉사)이 흔했습니다.
전쟁이 닥쳤을 때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쳐들어왔습니다. 부산진과 동래가 이틀 사이에 무너졌고, 왜군은 여러 갈래로 북쪽을 향해 5월 초 한양에 들어왔습니다. 임금은 그보다 앞선 4월 30일 새벽 한양을 떠났습니다.
왜군이 머문 고을에 남은 백성은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1593년 4월 사간원은 적에게 붙은 백성을 처단하자고 했고, 두 달 뒤 비변사는 어리석어 적에게 붙은 사람은 죄를 묻지 말자고 청했습니다.
의병으로 나선 사람들
1592년 4월 22일 경상도 의령의 유생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켰고, 6월에는 전라도의 고경명과 김천일이 뒤를 이었습니다. 경기에서도 홍계남과 우성전 같은 사람들이 의병을 모았습니다.
의병은 신분으로 보면 양반에서 천민까지 두루 퍼져 있었습니다. 의병장은 대개 전직 관원이었고, 군사로 나선 이들은 군사 훈련을 받아 본 적 없는 농민들이었습니다. 승려들이 모인 의승군도 큰 몫을 했습니다.
굶주림과 돌림병
전쟁 중 조선의 군사와 백성을 가장 괴롭힌 것은 식량난이었습니다. 명나라 군대가 들어온 뒤에는 군량을 대는 일이 더 큰 짐이 되었습니다.
1593년 겨울과 이듬해 초에는 기근과 돌림병이 겹쳤습니다. 한양의 진제장에서도 굶어 죽는 사람이 나왔고, 조정은 군사에게 약을 나눠 주며 돌림병에 대비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
많은 백성이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로 농사일에 부려지거나 노예로 팔렸습니다. 싸움 중에 잡힌 사람, 성을 쌓고 짐을 나르게 하려고 데려간 사람, 도공 같은 기술자도 있었습니다.
끌려간 사람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일본 학자는 2~3만 명, 한국 학자는 10만에서 40만 명까지로 봅니다.
전쟁 뒤 사신들이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왔지만, 돌아온 사람은 6천 명을 넘지 않습니다.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차별과 멸시를 받았고, 그래서 돌아오기를 꺼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쟁이 남긴 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쟁 전 170만 결이던 나라의 경작지가 54만 결로 줄었다고 적고, 일할 사람이 줄어든 것을 큰 까닭으로 꼽습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비롯한 많은 건물과 책, 그림이 불타거나 약탈당했습니다.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도 전주 사고만 남고 모두 불탔습니다.
전쟁 중에 공을 세우거나 곡식을 바친 사람에게 신분의 제약을 풀어 주는 일이 생기면서, 신분의 벽이 조금씩 느슨해졌습니다.
1608년에는 경기에서 공물을 쌀로 거두는 대동법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진 땅의 결수에 따라 쌀을 내게 한 것입니다.
게임 속 이야기와 실제 역사
3만일록은 실제 역사 위에 지어낸 한 사람의 인생을 얹은 게임입니다. 무엇을 지어냈고 무엇이 실제인지 나란히 적습니다.
- 사람
- 게임에서는주인공과 가족, 이웃은 모두 지어낸 사람입니다. 실제 역사 인물은 소문이나 소식으로만 나옵니다.
- 실제로는곽재우, 고경명, 김천일처럼 이 페이지에 나오는 사람은 실제 기록에 있는 인물입니다.
- 고을
- 게임에서는밀양, 김해, 남원, 양주 네 고을에서만 태어납니다.
- 실제로는전쟁은 부산에서 평양까지 조선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 신분
- 게임에서는양인 남녀로만 태어납니다.
- 실제로는조선에는 양반과 천민도 있었고, 의병에도 양반에서 천민까지 두루 나섰습니다.
- 혼인
- 게임에서는혼인하면 신랑이 신부 집에 들어가 살림을 시작하고, 몇 해 뒤 남편 쪽으로 옮길지 정합니다.
- 실제로는실제로도 신랑이 신부 집에서 혼인 생활을 시작하는 남귀여가가 오래 이어졌습니다.
- 날짜
- 게임에서는음력 한 달 단위로 흐릅니다. 달 끝에 일어난 일도 그 달 첫머리부터 일어난 일로 보입니다.
- 실제로는위 연표에는 자료로 확인한 날을 일(日)까지 적었습니다.
- 사건
- 게임에서는'역사' 표시가 붙은 기록만 실제 연표에서 왔습니다. 피난 길, 혼담, 이웃 다툼 같은 나머지 일은 그 시대에 있을 법한 일을 지어낸 것입니다. 명절 풍속 같은 생활 장면 일부는 아직 자료로 확인하는 중입니다.
- 실제로는이 페이지에는 자료로 확인한 사실만 적었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은 싣지 않았습니다.
참고 자료와 출처
이 페이지의 사실은 모두 아래 자료에서 확인했습니다. 날짜는 음력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가유산청 만인의총관리소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 선조실록 25년 4월 13일, 왜구가 쳐들어와 동래 부사 송상현 등이 죽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왜적이 부산진을 함락시키다
- 선조실록 25년 4월 30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전 부사 고경명이 군사를 일으키다
-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호남 의병장 김천일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다
- 선조실록 26년 4월 21일, 경성에 이 제독이 입성하였다고 아뢰다
- 선조실록 26년 12월 9일, 진제장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으므로 하리를 추고하다
- 선조실록 26년 12월 25일, 이시언을 진휼 어사에 임명하여 충청·경상도의 진휼을 맡기다
- 선조실록 27년 1월 2일, 전염병에 대비하여 군사에게 약을 지급하다
- 선조실록 30년 1월 21일, 청정이 바다를 건너왔으므로 방어하는 일을 아뢰다
- 선조실록 30년 9월 9일, 접반관 신충일이 직산 전투의 상황을 보고하다
- 광해군일기(정초본) 즉위년 5월 7일, 선혜청을 설치하다
- 광해군일기(정초본) 10년 7월 19일, 군병 1만 명을 징발하여 누루하치를 정벌하는 일로 전교하다
- 인조실록 5년 1월 19일, 강도로 파천할 것을 하교하다
- 선조실록 26년 4월 24일, 사간원이 왜적에게 부역한 자를 처단할 것을 아뢰다
- 선조실록 26년 6월 21일, 비변사가 어리석어 왜적에게 붙은 자들은 불문에 부치라고 청하다
- 선조실록 40년 7월 19일, 여우길·경섬 등이 일본에서 돌아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