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KOREAN-WAR · 1950~1953
새로운 인생 시작하기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본 역사
한국전쟁
해방과 분단, 전쟁과 이산을 한 생애에 겪은 사람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쳐내려오면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싸움이 멈춘 전쟁입니다. 3년 1개월 동안 전선은 남으로 낙동강, 북으로 압록강까지 오르내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피란길에 올랐고,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고향과 가족을 잃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한눈에 보기
- 기간
- 1950.6.25 ~ 1953.7.27 (휴전)
- 맞선 쪽
- 국군·유엔군 ↔ 북한군·중공군
- 유엔군
- 16개 나라가 군대를 보냄
- 서울
- 두 번 빼앗겼다가 되찾음
- 싸움터
- 국토의 80%에 이르는 지역
- 남은 것
- 휴전선, 1000만 명 규모로 말하는 이산가족
왜 일어났을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일본이 다스리던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나누어 점령했습니다. 38선 남쪽에는 9월에 미군정이 들어섰습니다.
남북이 함께 정부를 세우는 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1948년 5월 남쪽에서만 총선거가 치러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고, 북쪽에서는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습니다. 38선은 두 정부 사이의 경계가 되었습니다.
북한은 소련의 도움으로 군사력을 키웠고, 1949년 6월 주한미군은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했습니다. 백과는 북한의 김일성이 1949년 말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 무력 통일을 준비했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했다고 적습니다.
실제 역사 연표
날짜는 모두 양력입니다. 게임 속 날짜도 같은 양력을 씁니다.
1938~1945년 · 전쟁 동원과 해방
1938년 4월
보통학교가 소학교로 바뀜
3월 4일 공포된 제3차 조선교육령으로 보통학교의 이름이 소학교로 바뀌었습니다.
1938년 5월 5일
국가총동원법이 조선에도 시행됨
4월 1일 일본이 공포한 국가총동원법을 5월 5일부터 조선에서도 시행했습니다. 이 법과 함께 학생·여성·농촌 일손을 끌어모으는 근로보국대가 6월에 학교마다, 7월에는 지역마다(20~40세 남녀) 만들어졌습니다.
1940년 2월 11일
일본식 성을 새로 정해 신고하게 함 (창씨)
조선민사령을 고쳐 2월 11일부터 8월 10일까지 조선 사람에게 일본식 씨명을 정해 신고하게 했습니다.
1941년 4월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바뀜
3월 31일 국민학교령으로 소학교의 이름이 국민학교로 바뀌었습니다.
1942년 3월
관청이 나서서 일꾼을 모아 보내기 시작함 (관알선)
일꾼을 모아 보내는 방식이 '모집'에서 관청이 직접 나서는 '관알선'으로 바뀌었습니다. 1944년 10월부터는 영장으로 끌어가는 징용이 되었습니다.
1944년 4월 1일
조선 청년의 첫 징병검사
4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 조선 청년의 첫 징병검사가 치러져 20만 6,057명이 검사를 받았습니다. 합격자는 그해 9월부터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차례로 끌려갔습니다.
1944년 10월
징용 영장이 나오기 시작함
국민징용령을 조선에도 적용해 영장으로 일꾼을 끌어갔습니다. 영장에 따르지 않으면 처벌을 받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해방됨
일본이 항복하고 나라가 해방되었습니다.
1945년 9월 7~9일
38선 남쪽에 미군이 들어와 군정을 폄
7일 맥아더 포고 제1호로 38선 남쪽에 미군정이 선포되었고,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 9일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황해도 연백군은 군의 일부가 38선 남쪽에 들었습니다.
1946~1950년 봄 · 갈라진 나라
1946년 10월 23일
본래 성과 이름을 되찾게 함
군정청 법령 제122호 조선성명복구령으로 일본식 씨명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 되었습니다. 호적은 60일 뒤 호적리가 고쳤고,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쓰려는 사람은 60일 안에 신고하게 했습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시위와 충돌이 경북 여러 고을로 번짐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시위와 충돌이 3일부터 성주·칠곡·영천 등 경북 여러 고을로, 10월 하순부터는 전남으로 번졌습니다.
1948년 5월 10일
처음으로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
5월 10일 총선거로 처음 국회의원을 뽑아 제헌국회를 꾸렸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에서 군인들이 일으킨 일로 큰 희생이 남
여수에 머물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일부가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이후 오랫동안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1949년 4월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짐
정부가 좌익 활동을 하다 돌아선 사람들을 이끈다며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습니다.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만들어짐
농지개혁법이 만들어졌습니다. 농가 한 집이 3정보(약 9천 평)를 넘게 가진 논밭은 정부가 사들여 농민에게 나누도록 했습니다.
1949년 8월
병역법이 만들어져 징병이 원칙이 됨
병역법이 공포되어 징병이 원칙이 되었습니다.
1950년 3월
농지개혁이 시행되어 소작하던 논을 나눠 받음
3월 10일 고친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25일 시행령이 나왔습니다. 나눠 받은 농가는 평년 소출의 1.5배를 5년에 나누어 갚았습니다.
1950~1953년 · 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쳐내려옴
새벽, 북한군이 서쪽 옹진반도에서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인민군에게 넘어감
북한군이 38선을 뚫고 서울과 춘천, 강릉을 점령했습니다.
1950년 6월 28일
한강 다리가 끊어짐
오전 2시 30분쯤 한강 철교 3개와 인도교 1개가 폭파되었습니다.
1950년 7월
서울에서 많은 사람이 북으로 끌려감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많은 민간인이 북으로 끌려갔습니다. 정부는 1952년 처음으로 전국을 조사해 피납치자 명부를 만들었습니다.
1950년 7월
보도연맹원들이 붙잡혀 간 뒤 많은 사람이 돌아오지 못함
전쟁이 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곧바로 소집·구금했고, 전황이 불리해져 후퇴하면서 이들을 법적 절차 없이 집단으로 학살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사건별로 조사했습니다.
1950년 7월
인민군이 광주에 들어오고 전남 고을들이 점령됨
7월 인민군이 광주를 점령했습니다.
1950년 8월 1일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까지 물러남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을 따라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선까지 물러났습니다.
1950년 8월
다부동 산줄기에서 큰 싸움이 벌어짐
8월 초부터 국군 제1사단이 칠곡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 냈습니다. 산 위의 진지에는 노무자들이 지게로 탄약과 식량을 져 날랐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함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같은 날 낙동강 전선에서도 총반격을 시작했습니다.
1950년 9월
서울을 되찾음
인천에 상륙한 부대가 26일 서울에 들어갔고, 29일 서울 수복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1950년 9월
인민군이 전남에서 물러가고 일부는 산으로 들어감
23일 무렵부터 북한군이 모든 전선에서 물러났고, 유엔군이 호남으로 돌아 들어갔습니다. 물러나던 북한군 일부는 지리산 등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19일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 들어감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에 들어갔습니다.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전쟁에 들어옴
청천강을 넘어 북쪽으로 나아가던 국군과 유엔군 앞에 중공군이 나타났습니다.
1950년 12월 14~24일
흥남에서 군인과 피란민이 배로 철수함
퇴로가 막힌 동부전선의 부대가 흥남에서 배로 부산까지 철수했습니다.
1950년 12월 16일
국민방위군이 만들어져 장정들을 불러 모음
국민방위군설치법이 통과되어, 이튿날부터 만 17세에서 40세 미만의 장정을 불러 모았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남쪽으로 물러남 (1·4 후퇴)
중공군의 공세로 서울을 다시 빼앗겼습니다. 정부와 많은 민간인이 다시 남쪽으로 피란길에 올랐습니다(1·4 후퇴).
1951년 2월
피란지에 천막 학교와 전시연합대학이 열림
피란지에 전시연합대학이 문을 열었습니다. 교실이 모자란 부산의 국민학교는 천막을 치고 수업했습니다.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다시 되찾음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다시 되찾고, 3월 말 38선을 회복했습니다.
1951년 5월 12일
국민방위군이 해체됨
국회의 결의로 국민방위군이 해체되었습니다. 간부들이 나랏돈을 빼돌린 일이 드러나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불렸습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됨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2년 넘게 38선 부근의 고지를 두고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1953년 6월 18~19일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들이 풀려남
부산·광주·논산 등 8개 지역 포로수용소에서 북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포로 2만 7천여 명이 풀려났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짐
휴전협정이 맺어져 3년 1개월 만에 싸움이 멈추었습니다. 이 휴전으로 황해도 연백군은 군 전체가 북한 지역에 들어갔습니다.
1953년 8월
정부가 서울로 돌아옴
정부가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국회도 이달까지 부산 경상남도청 무덕전을 의사당으로 쓰다가 서울로 옮겼습니다.
전쟁 뒤 · 그 세대가 겪은 일들
1960년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섬
일요일 등교 지시에 맞서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서고 대통령이 물러남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섰고,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군인들이 정권을 잡음
군인들이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았습니다.
1962년 1월
나라에서 가족계획 사업을 시작함
1961년 국가 시책으로 정한 가족계획사업이 1962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읍·면·동마다 가족계획 요원을 두었습니다.
1962년 6월 12일
돈의 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바뀜
통화개혁으로 돈의 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바뀌고, 10환을 1원으로 바꾸었습니다.
1964년 9월
국군이 베트남으로 파병되기 시작함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었습니다.
1969년 1월
서울에서 중학교 입학시험이 없어짐
중학교 입학시험을 없애고 학군별 추첨으로 학교를 정하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 서울, 1970년 부산·인천 등 9개 도시, 1971년 전국으로 넓혔습니다.
1970년 4월
새마을가꾸기 운동이 시작됨
새마을가꾸기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970년 10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마을마다 시멘트를 나눠 주어 마을 안길과 지붕을 고치게 했습니다.
1972년 7월 4일
남과 북이 함께 성명을 발표함
남과 북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전쟁 뒤 남북 당사자가 처음으로 함께 낸 합의였습니다.
1980년 5월 18~27일
광주에서 계엄군에 맞선 시민들이 큰 희생을 치름
광주에서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했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1983년 6월 30일
이산가족을 찾는 생방송이 시작됨
6월 30일 밤 시작된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이 11월 14일까지 138일, 453시간 45분 동안 이어졌고, 1만 189명이 가족을 만났습니다.
1985년 9월 20일
남북 고향방문단이 오가며 처음으로 가족이 만남
남과 북에서 각각 151명의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이 판문점을 지나 3박 4일 동안 서울과 평양을 찾았습니다. 처음 이루어진 고향 방문으로, 평양에 간 남쪽 방문단 35명과 서울에 온 북쪽 방문단 30명이 가족·친척을 만났습니다.
1987년 6월 10일
6월 내내 거리에서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짐
6월 10일부터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이어졌고, 6월 29일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선언이 나왔습니다.
1997년 11월
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아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음
외환위기를 맞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았습니다.
2000년 8월 15일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이 서로 오감
6월 남북정상회담의 합의에 따라 8월 15일 이산가족 방문단이 서로 오갔습니다. 2003년 2월까지 여섯 차례 상봉이 이어졌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
왕과 장군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 낸 사람들의 하루를 따라가 봅니다.
전쟁 동원과 공출 (1938~1945)
1940년부터 쌀을 강제로 거두는 공출이 시작되었고, 1943년에는 식량관리법으로 더 넓어졌습니다. 쇠붙이를 모은다며 집집의 놋그릇과 숟가락까지 거두어 갔습니다.
일꾼을 데려가는 방식은 모집에서 관알선을 거쳐 1944년 10월부터 영장으로 끌어가는 징용이 되었습니다. 일본과 사할린 등지의 탄광과 공사장으로 간 사람이 많았습니다. 1944년 4월부터는 조선 청년도 징병검사를 받았습니다.
해방과 돌아온 사람들
바다 건너 끌려갔던 사람들은 배로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항구마다 배를 탈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줄을 섰고, 스스로 배편을 구해 돌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1946년 10월 조선성명복구령으로 일본식 씨명은 처음부터 없던 것이 되었습니다. 해방 뒤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은 미군정 아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 논을 갖게 된 농민
1949년 농지개혁법은 한 집이 3정보를 넘게 가진 농지를 정부가 사들여, 그 땅을 부치던 농민에게 나누어 주게 했습니다. 나눠 받은 농민은 평년 소출의 1.5배를 5년에 걸쳐 나누어 갚았고, 다 갚기 전에는 그 땅을 팔 수 없었습니다.
피란과 피란지의 삶
1951년 1월 서울을 다시 빼앗기자 정부와 많은 민간인이 남쪽으로 피란했습니다. 부산의 국제시장은 몰려든 피란민들로 붐볐고, 구호품과 군용품이 생활용품과 함께 거래되었습니다.
피란지에서도 학교는 다시 열렸습니다. 교실이 모자라 천막을 치고 수업했고, 대학들은 모여서 전시연합대학을 열었습니다.
강화 교동도는 북쪽으로 2~3km 바다 건너 황해도 연백군과 마주한 섬입니다. 1951년 4월 해병대가 섬에 들어갔을 때 700여 명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고, 광복 때 8,644명이던 섬 인구는 전쟁 뒤 피난민으로 늘어 1965년 1만 2,443명에 이르렀습니다.
지게를 진 사람들
산악 지대의 진지에는 노무자들이 지게로 탄약과 식량, 물을 져 날랐습니다. 유엔군은 지게가 알파벳 A를 닮았다며 이들을 'A Frame Army'라고 불렀습니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전선 부대를 도운 노무자 가운데 확인된 희생자만 8,794명입니다.
끌려간 사람, 기다린 사람
북한군은 점령한 곳에서 청년과 소년을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끌어갔습니다. 서울에서는 많은 민간인이 북으로 끌려갔고, 정부는 1952년 전국을 조사해 피납치자 명부를 만들었습니다.
1950년 12월에는 만 17세에서 40세 미만의 장정을 국민방위군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이듬해 간부들이 나랏돈을 빼돌린 일이 드러났고, 국민방위군은 5월 해체되었습니다.
전쟁이 남긴 것
전쟁은 남과 북의 학교, 병원, 집, 공장, 도로와 다리를 무수히 부수었습니다. 백과는 남북 모두의 사회와 경제의 기반이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적습니다.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실향민이 생겼습니다. 흩어진 가족의 수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흔히 1000만 명 규모로 말합니다. 실향민들은 명절이면 함께 모여 실향제를 지냈고, 교동도 화개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망향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1983년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은 138일 동안 이어져 1만 189명이 가족을 만났습니다. 1985년 처음 고향방문단이 오갔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 뒤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여러 차례 이어졌습니다.
게임 속 이야기와 실제 역사
3만일록은 실제 역사 위에 지어낸 한 사람의 인생을 얹은 게임입니다. 무엇을 지어냈고 무엇이 실제인지 나란히 적습니다.
- 사람
- 게임에서는주인공과 가족, 이웃과 동무(삼봉, 병구, 금순, 덕보 영감 등)는 모두 지어낸 사람입니다. 실제 역사 인물은 소식으로만 나옵니다.
- 실제로는이 페이지에 나오는 사건과 날짜는 모두 자료로 확인한 것입니다.
- 고을
- 게임에서는전남 나주, 서울 동대문 밖, 황해도 연백, 경북 칠곡 네 곳에서만 태어나고, 피란과 이주로 부산·교동도·인천·구미에 갑니다.
- 실제로는전투는 국토의 80%에 이르는 지역에서 벌어졌습니다.
- 연백
- 게임에서는연백 사람은 1951년 1월 배로 교동도나 부산에 피란하고, 휴전으로 고향을 잃습니다. 북쪽에 남는 인생은 두지 않았습니다.
- 실제로는연백군은 휴전협정으로 군 전체가 북한 지역에 들어갔습니다. 교동도에는 전쟁 동안 피난민이 모였습니다.
- 날짜
- 게임에서는양력 한 달 단위로 흐릅니다. 달 끝에 일어난 일도 그 달 첫머리부터 일어난 일로 보입니다.
- 실제로는위 연표에는 자료로 확인한 날을 일(日)까지 적었습니다.
- 사건
- 게임에서는'역사' 표시가 붙은 기록만 실제 연표에서 왔습니다. 피란길, 혼담, 동무의 부탁 같은 나머지 일은 그 시대에 있을 법한 일을 지어낸 것입니다.
- 실제로는이 페이지에는 자료로 확인한 사실만 적었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은 싣지 않았습니다.
- 무거운 일
- 게임에서는학살, 처형, 납북 같은 일은 일어났다는 것만 담고 장면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돌아오지 못한 인생에는 엔딩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 실제로는보도연맹 사건처럼 민간인이 희생된 일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사건별로 조사했습니다.
참고 자료와 출처
이 페이지의 사실은 모두 아래 자료에서 확인했습니다. 날짜는 음력입니다.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국가보훈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